[창업] 쫄딱 망한 호프집 사장, 4조원대 회장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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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00회 작성일 19-10-12 19:45본문
[윤석만의 이노베이터] 한국 지분 100% 첫 글로벌 제약회사
글로벌 항암제 리보세라닙을 개발한 미국 엘레바(elevar)가 100% 한국 회사가 된다. 엘레바의 지분을 총 74.92% 갖고 있는 에이치엘비(회장 진양곤)가 10일(미국 시간) 미국 법인을 통해 합병 계약을 체결했다. 리보세라닙은 글로벌 신약으로 평가받는 표적 항암제로 미국 식품의약청(FDA) 승인 심사를 앞두고 있다. 에이치엘비는 2009년부터 꾸준히 엘레바에 투자하며 지분을 늘려 왔다. 진 회장은 "이번 합병 계약을 통해 100% 국내 자본으로 이뤄진 한국 최초의 글로벌 제약회사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리보세라닙에 대한 임상(3상) 실험 결과는 지난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유럽종양학회(ESMO)에서 최고 논문상을 받았다. 리보세라닙의 '블록버스터 신약' 가능성이 커지면서 에이치엘비는 최근 코스닥 시가총액 2위 기업으로 뛰어올랐다. 토종 바이오기업으로 글로벌 무대의 문을 두드리는 진 회장을 심층 인터뷰했다.
포근했다. 그의 사무실 공기는 마치 오래된 책방에 들어온 것처럼 따뜻했다. 두 면을 가득 메운 책장은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것도 아니다. 일부는 누운 채, 또 다른 일부는 거꾸로 매달리듯 책장을 꼭 붙들고 있었다. 온종일 책에 파묻혀 사는 영락없는 서생(書生)의 연구실로 보였다.
인사를 건네는 진 회장 또한 학문에 몰두하는 연구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안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날카롭고 예리했다. 한창 작업 중인 듯 책상은 어지러웠지만, 차림새는 단정했다. 목소리는 온화했으나 악수를 청하는 그의 말투엔 강단이 있었다. 진 회장은 먼저 글로벌 항암 신약의 임상실험 성공 사실부터 전했다.
Q : 본론부터 들어가자. 에이치엘비의 자회사인 엘리바의 항암 치료제가 유럽종양학회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
A :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학회 중 하나인 유럽종양학회(ESMO)가 지난 9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다. 여기서 발표된 3904개의 논문 중 우리가 개발한 리보세라닙의 임상 연구 결과가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됐다. 글로벌 블록버스터 항암제인 옵디보와 키트루다와 함께 뽑혔기 때문에 신약으로서는 매우 큰 영광이다.”
Q : 신약의 어떤 점이 학회에서 인정받은 것인가.
A : “리보세라닙 관련 연구는 이미 미국암학회(ASCO)에서도 베스트 논문으로 선정된 바 있다. 특히 이번 ESMO에서는 임상 실험에서 종양의 완벽한 소멸을 의미하는 ‘완전 관해(complete remission)’ 사례가 보고됐고 말기 암 환자에게 큰 효과가 있다는 점이 입증됐다. 암 환자의 마지막 치료제로 높은 효능과 낮은 부작용을 보였다는 점이 의미가 크다.”
Q : 리보세라닙의 효능이 말기 암 환자들에게서 입증됐다는 이야긴가.
A : “암세포는 치료가 계속될수록 해당 약품에 대한 내성을 기른다. 그래서 1차 치료제가 안 먹히면 2차 치료제로 약을 바꾼다. 리보세라닙은 현재 3·4차 치료제로써 높은 평가를 받았다. 향후 임상 연구를 계속해 1·2차 초기 치료제로도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Q : 리보세라닙의 일본 판권을 일본 제약사에 넘기는 '라이센스 아웃'도 진행 중인데.
A : "꾸준히 논의해 왔다. 그러나 최근 리보세라닙의 우수성이 계속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선 서두를 필요가 없다. 보통 라이센스 아웃을 하면 매출의 12% 정도를 로얄티로 받는 걸로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훨씬 많은 로얄티로 논의 중이다. 그만큼 신약에 대한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리보세라닙은 현재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승인을 앞두고 있다. 24일 신약 허가 사전 미팅 절차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신약 심사 과정에 들어간다. 제약업계에서 FDA의 승인은 글로벌 라이센스와 같다.
Q : 리보세라닙은 중국에선 이미 항암제로 쓰이고 있지 않나.
A : “2014년부터 중국 내의 판권을 가진 헝루이제약이 판매하기 시작했다. 에이치엘비는 중국 이외의 모든 국가에서 판권을 갖고 있다. 실제 항암 치료에서 5년간 높은 효능과 낮은 부작용을 보였다는 게 큰 의미가 있다. 한국 최초의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이 나올 기회다.”
Q : 일반 독자들은 항암 치료제의 개념이 낯설다. 쉽게 설명해 달라.
A : “암세포도 성장을 위해선 혈액의 공급을 받아야 한다. 즉, 정상 세포로 가장해서 혈액을 요청하는 거다. 그 대신 성장 속도가 매우 빠르다. 결국 혈액이 공급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이때 리보세라닙은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게 아니라 혈액을 차단해 버리는 거다. ‘말려 죽인다’고 보면 된다.”
항암 신약을 설명하는 내내 그는 쉬운 말로 바꿔 말했다. 분야 자체가 매우 전문적이고 딱딱해 일반인들은 이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도 그는 과거 전쟁의 보급전을 예로 들었다. 성을 직접 공격해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수로를 차단하고 보급로를 끊어 성안의 적군들을 무너뜨린다는 식이다.
Q : 정상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나.
A : “리보세라닙은 표적 항암제다. 암세포로 추정되는 것들에만 혈액 공급을 차단한다. 과거 독성 항암제는 모든 세포에 반응했다. 그 때문에 눈썹과 머리카락이 빠지는 등 부작용이 심각했다.”
Q : 이번 임상 결과는 위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다른 암에도 효과가 있나.
A : “다른 암의 치료제로 쓰일 수 있도록 계속 임상 실험을 하고 있다. 현재 간암 1차 치료제로도 임상 연구(3상) 중이다. 위암·대장암·선낭암 등 조금씩 확대해 가고 있다. 특히 중국 판권을 가진 헝루이제약이 여러 암을 대상으로 임상 실험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 결과치를 보고 임상 대상을 선정하기 때문에 다른 신약 개발사에 비해 유리하다.”
Q : 리보세라닙은 에이치엘비의 신약인데, 헝루이제약이 이미 판매하고 있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A : “리보세라닙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미국 어드밴천 연구소의 폴 첸 박사다. 중국계인 첸 박사는 리보세라닙에 대한 중국 판권을 항루이제약에, 그 외 모든 국가의 판권은 에이치엘비의 자회사인 엘리바에 양도했다. 이후 항루이제약은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 임상 실험에 성공했고 2014년부터 시판에 들어갔다.”
신약은 개발 후에도 임상 실험 결과에서 효능을 인정받아야 시판이 가능하다. 특히 생명과 직결되는 항암제의 경우 임상 연구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러므로 약품 개발 후에도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임상 결과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야만 실제 치료제로 쓰일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에이치엘비가 처음부터 제약회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원래 구명정을 만드는 선박회사였다. 그런 회사가 전혀 분야가 다른 제약사업에 투자하게 된 이유는 뭘까. 이를 알기 위해선 진 회장 개인의 인생 스토리부터 살펴봐야 한다.
Q : 처음 은행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지 않았나.
A : “맞다. 은행 본점에서 주로 기획 관련 업무를 했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 때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명퇴’를 했다. 퇴직금으로 빚을 갚고, 동료들이 돈을 빌려줘서 호프집을 열었다. 그런데 1년 만에 쫄딱 망했다. 원래 술집과 백화점, 카지노엔 시계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나는 멋진 벽시계를 인테리어라고 생각해 걸어 놨다. 그 정도로 감각이 없었다.”
Q : 호프집이 실패한 다음엔 뭘 했나.
A : “생계가 막막하고 앞이 캄캄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돌아봤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했다. 은행 융자부에 있으면서 흥하는 회사와 망하는 기업을 구분하는 안목이 생겼다. 그래서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처음엔 직원 20여명의 조그만 기계부품 회사의 경영 컨설팅을 맡았는데 이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입소문이 나면서 사업이 커졌다.”
몇 년 동안 휴일도 없이 일했던 그는 컨설팅만 해줄 게 아니라, 직접 경영에 도전하기로 나선다. 그렇게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구명정 제조회사인 현대라이프보트였다. 그 후 M&A를 통해 하이쎌과 이노GDN이라는 회사를 사들였다. 그런데 당시 이노GDN이 투자한 회사 중 하나가 리보세라닙을 개발 중인 미국의 LSKB(현 엘리바)였다.
Q : 사업 초기에 선박사업부터 전자·바이오 산업까지 투자 분야가 매우 넓었다.
A : “미래를 생각해 봤다. 그 당시엔 국내 유일의 구명정 회사였기에 당장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만일 SF영화처럼 구명정 대신 캡슐을 사용하게 되면 어떨까. 또 현대중공업이 직접 구명정을 만들면 어쩌나.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됐다. 결론은 변화의 속도가 빠른 시대에 한 우물만 파다 보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Q : 바이오 산업은 처음부터 계획에 있었나.
A : “아니다. 우리가 인수한 이노GDN이 우연하게도 신약 개발사에 투자 중이었다. 당시 내부적으로는 투자를 중단하자고 했다. 그런데 기왕 돼 있는 거 직접 만나보고 결정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가 연구자들을 만났다. 그때만 해도 바이오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설명을 들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믿을 만 하구나’ 하는 직관적 느낌이 왔다.”
Q : 선뜻 이해 가지 않는다. 중요한 투자를 직관에 의존했다는 점이.
A : “M&A를 하면서 얻은 교훈은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혁신을 끌어내는 것도,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도 사람이다. 당시 연구자들에게서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 도덕성이다. 이들은 연구에 대한 순수한 마음 하나로 어려운 시기를 버티고 있었다. 둘째 열정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일하는 모습을 봤다. 이 정도라면 실패해도 후회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어깨너머로 다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이 선명하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서양 철학가들의 고전부터 주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책이 즐비했다. 도무지 코스닥 시가총액 2위 바이오 회사의 CEO로선 어울리지 않는 도서들이었다.
Q : 경영하는 데 있어 독서가 도움 되나.
A : “당연하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여러 책을 본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철학서다. 철학은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규정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경영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읽고 움직이게 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인간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본질을 이해하는 데 철학만큼 좋은 게 없다.”
Q : 기업경영 과정에 철학을 적용한다면.
A : “세상엔 크게 두 개의 안경이 있다. 현미경과 망원경이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현미경으로 세상을 본다. 현미경으로 전문성을 높일 수 있지만 자칫하면 도그마에 빠질 수 있다. 언제든 앞선 기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M&A나 투자처를 선정할 때 ‘우리 기술이 최고’라고 말하는 곳은 절대 투자하지 않는다. 망원경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타인의 생각과 만나 꽃을 피울 수 있다. 기술의 독선 때문에 ‘열린사회의 적’이 돼선 안 된다.”
오랜 대화 끝에 그의 말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직관(直觀·intuition)’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리보세라닙에 대한 대대적 투자 이유를 사람에 대한 직관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직관은 무엇인가.
보통 직관은 ‘통찰(洞察·insight)’과 함께 쓰이지만 의미는 사뭇 다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본질적인 곳까지 깊이 바라보는 사람을 일컬어 직관과 통찰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직관과 통찰 모두 '내적(in-)'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통찰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과 현상의 이면을 따져 보는 것’이고 직관은 ‘감각과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것’이란 점에서 다르다.
통찰은 이미 취득한 정보와 지식을 분석하고 날카롭게 살펴봄(sight)으로써 이뤄진다. 통찰을 위해선 경험된 정보가 있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리와 추론이라는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한 경험과 사고의 과정 이후에 어느 정도 시간이 쌓인 후(연륜)에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직관은 순간적이다. ‘다른 생각의 작용을 거치지 않고 직접 대상을 파악하는 정신 능력’이라는 인식론에서의 정의처럼 통찰에 전제되는 논리와 추론의 과정은 생략돼 있다. 즉, 통찰은 ‘꿰뚫어 보는 힘’이며 직관은 ‘딱 보면 아는 것’이다.
AI가 인간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갖고, 인간보다 뛰어난 논리와 추론 능력을 갖출 순 있어도 직관을 가질 순 없다. 디지털 신호로 이뤄진 고도의 알고리즘이 0과 1 사이의 간극을 제아무리 촘촘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이는 무수한 점의 집합일 뿐 그 자체가 선(line)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양곤 회장은 직관이 탁월한 인물이다. 스스로도 이를 인정한다. 인터뷰 내내 그는 “디테일에는 약하지만 전체를 보는 능력은 뛰어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디테일에도 강한 인물이다. 부분을 모르면서 전체를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재의 직관과 달리 범인(凡人)의 직관은 통찰이 겹겹이 쌓였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